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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년 선교부 세미나-이덕주 교수 강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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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WSCS 작성일 10-01-24 14:28 조회 1,519 댓글 0
 
첨부 05선교부세미나자료집.hwp (2.0M) 995회 다운로드 DATE : 2010-02-01 12:05:20
제목: 아시아 선교의 역사
강사: 이덕주 목사(감신대 교회사 교수)
강의일: 2005년 2월 17일

1. 성서와 사도시대의 아시아

‘아시아’(Asia)란 용어는 헬라어 ‘아나톨리아’(anatolia)에서 유래하였다. 이는 “땅 끝에 있는 곳”이란 뜻이었다. 성서와 사도시대에 ‘아시아’는 에게해 동쪽 리디아(Lydia) 지방, 지금의 터기 중서부 지역을 의미하였다. 주전 3천년 경 트로이를 거점으로 청동기 문화가 발전하였고, 주전 2000년경에는 힛타이트족(성경의 히위 족속)이 강력한 부족 국가를 이루었으며 주전 1000년경 그리스의 침공을 받았으며 주전 500년경에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주전 300년 경 마게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이곳을 거쳐 페르시아를 침공하였고 주전 200년 이후 셀류코스 왕국, 앗달리아 왕국이 건설되어 한 때 융성하였으나 주전 133년 로마 제국에 합병되었다. 지리적으로 서방의 그리스-로마와 동방의 바벨론-페르시아 가운데 위치하여 해안 도시 드로아와 에베소, 밀레도스를 중심으로 동서 교역이 성했으며 사데, 빌라델비아, 서머나, 두아디라, 라오디게아 등 내륙 도시 문화가 발달하였다. 따라서 사도시대(주후 1세기) ‘아시아’는 좁게는 리디아 지방을, 넓게는 북부 비두니아와 동부 갈라디아, 남부 밤빌리아까지 포함하는 지금 터기 전역을 의미하였다.
사도시대 이전부터 이 지역 도시들에는 유대인 정착민(diaspora)들이 많이 살고 있어 아시아 여러 도시에 유대교 회당들이 건립되었으며 이들 아시아 출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정기적으로 순례하며 유대교 신앙을 지켰다. 그런 배경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성령에 감동받아 ‘방언’으로 설교할 때 오순절 순례를 하러 왔던 ‘아시아’ 사람도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다(행 2:9). 이방인의 사도 바울은 3차에 걸친 전도여행에서 아시아를 주요 선교 무대로 삼았는데 특히 아시아 내륙 진출의 거점이었던 에베소를 선교의 구심점으로 삼았다. 바울은 아시아 선교를 발판으로 삼아 그리스-로마 세계에 복음을 전하였다. 베드로도 아시아 교인들에 대한 목회 관심을 표명하였고(벧전 1:1), 사도 요한은 아시아 교회 감독자로서 밧모섬에서 아시아 7개 교회에 편지를 보낸 것이 계시록의 주요 내용이 되었다(계 1:4). 이처럼 사도 시대 아시아는 팔레스틴 지방에서 발원한 복음의 역사가 땅 끝(로마)으로 확산되는 중간 거점이었다. 

2. 고대 기독교사와 아시아 선교

로마 제국의 멸망(주후 6세기) 이전, 오늘의 아시아 서부 지역에 해당하는 팔레스틴 북부 시리아와 페르시아 지역에서 전개된 기독교 선교의 역사를 알려주는 정보는 극히 미약하다. 그 이유는 4세기 이후 동․서방 교회 사이에 전개된 고대 기독교회의 교리 논쟁과 교회 주도권 쟁탈전에서 동방교회가 패한 것과 7세기 아라비아반도에서 발원한 이슬람(Islam) 세력이 동방교회 거점들을 점령하면서 기독교를 탄압하여 동방교회 역사 자료들이 대부분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리아와 로마를 중심한 서방교회는 시리아의 안디옥을 중심한 동방교회와 치열한 교리 논쟁을 벌여 승리하였고, 그 결과 동방교회 중심 세력은 ‘이단’의 누명을 쓰고 로마제국 밖으로 추방당하였고 그 지역마저 이슬람 세력에 점령당하면서 동방교회는 1천년 넘게 탄압과 박해를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동방에 전파된 기독교 복음은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었다. 우선 사도시대 시리아 에뎃사에 그리스도의 제자 다대오(아다이)가 가서 전도하여 그 곳 군주가 복음을 받아들여 시리아 전역에 복음이 확산되었는데 오늘까지 시리아 정교회(Syrian Orthodox)로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비록 정경(正經)에는 포함되지 못했지만 <페쉬타>, <아다이의 교리>, <도마행전>, <조화복음서>, <도마복음서> 등 사도시대 전통을 반영한 각종 시리아어 고대 문헌이 남아 있어 시리아교회의 오랜 역사 전통을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시리아 북부 아르메니아에도 복음이 전파되어 아르메니아 정교회(Armenian Orthodox)가 성립되었는데 아르메니아교회는 동유럽과 러시아 선교의 거점이 되었다. 걸프만 유역의 바벨론과 페르시아에도 일찍이 복음이 전파되었는데 로마제국과 경쟁 관계에 있던 페르시아에서는 로마제국에서 ‘이단’으로 정죄당한 동방교회를 보호하였다. 그러나 이들 지역도 7세기 이후 이슬람 세력권 아래 들어가면서 종교적 탄압을 받았다. 

3. 도마의 인도 선교

시리아어로 된 <도마행전>에 의하면 그리스도 부활 이후 12제자가 모여 세계 선교지역을 정할 때 제비뽑기로 도마에게 할당된 지역은 인도였다고 한다. 목수 출신인 도마는 처음 몸이 약하다는 핑계로 인도에 가기를 거절하였으나 인도 변방의 한 부족국가 왕인 군다포로스가 자기 궁전을 지을 목수를 구하기 위해 팔레스틴에 보낸 사신(합반)에게 ‘팔리는 몸’이 되어 배를 타고 인도로 가게 되었다. 인도에 도착한 도마는 군다포로스 왕으로부터 “6개월 안에 화려한 궁전을 지으라.”는 명령을 받고 건축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도마가 한 일은 왕궁의 재물로 시장에 나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왕궁 재물을 탕진한 것을 알고 군다포로스는 분노하여 도마를 옥에 가두었다. 도마가 사형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 왕의 동생이 빈사상태에서 하늘나라를 구경하였는데, 그곳에서 군다포로스 왕의 소유라는 크고 화려한 궁전을 보게 되었다. 깨어난 동생은 그 사실을 왕에게 알렸고 왕은 도마가 지은 궁전이 ‘땅의 궁전’이 아니라 ‘하늘의 궁전’이었음을 깨달았고 도마를 석방하여 그의 선교 활동을 허락하였다. 이후 도마는 인도 전역을 다니며 전도하다가 적대자들의 손에 순교 당하였다.
전설적인 이야기지만 <도마행전>은 인도에 전파된 고대 기독교 선교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이미 고대로부터 인도와 페르시아 간에는 해상 무역이 원활하여 팔레스틴과 페르시아에서 기독교 복음이 인도로 전파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인도의 토착 종교인 힌두교 때문에 기독교 선교가 활발하지는 못했지만 기독교 역사의 맥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즉 지금 인도 동남부 해안 말라바르 지역에는 도마의 선교로 세워진 도마교회 전통을 고수하는 교회가 남아 있다. 지금도 말라바르교회(Malrabar Church) 교인들이 드리는 기도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다.
“성 도마로 말미암아 인도에 우상숭배가 사라졌다.”
“성 도마로 말미암아 중국과 이디오피아가 진리로 돌아섰다.”
“성 도마로 말미암아 그들이 세례를 받고 성부 성자 성령을 믿고 고백하였다.”
“성 도마로 말미암아 그들이 오직 한 분 하나님만 믿는 신앙을 보존했다.”
“성 도마로 말미암아 인도 전역에 생명을 주는 법이 생겼다.”
“성 도마로 말미암아 하늘나라가 중국에까지 퍼져나갔다.”

4. 네스토리우스파의 중국 선교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교리 논쟁을 다룬 에베소공의회(431년)에서 동방교회 전통의 네스토리우스(Nestorius)가 서방교회 신학자들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당하고 그 추종 세력은 로마제국 밖으로 추방당하였다. 페르시아 제국은 네스토리우스파를 적극 수용하였고 이후 네스토리우스파 교회는 페르시아를 거점으로 동방에 선교사들을 파송하였다. 그리하여 5세기 중반 인도 남부 실론 섬에 네스토리우스파 교회가 설립되었고 그곳을 거점으로 인도 전역에 네스토리우스파 교회가 퍼져 나갔다. 같은 시기 비단길을 통해 페르시아와 중국 사이에 교역이 활발하였는데 이 교역로를 통해 페르시아로부터 네스토리우스파 선교사들이 중국 당나라 국경(장안)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즉 당나라 태종 9년(635년) 네스토리우스파 선교사 ‘아라본’이 황제의 환영을 받으며 장안에 도착, 선교를 시작하였다. 당나라에 들어온 네스토리우스파는 ‘경교’(景敎)란 이름으로 활동하였다. 경교는 같은 페르시아에서 들어온 ‘회교’(回敎, 이슬람), ‘요교’(祅敎, 조로아스터교)와 함께 ‘삼이사’(三夷寺)로 분류되어 당나라 황실의 보호를 받으며 2백 년 동안 융성하였다. 그러나 중국에 들어온 네스토리우스파는 ‘외래 종교’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였고 당나라 말기(845년) 외래 종교 탄압 정책으로 멸절되었다. 지금 장안에 남아 있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는 당나라 시대 4만-7만 신도를 보유하며 유행하였던 경교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당나라 멸망 이후 한동안 중국 땅에서 기독교 선교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다가 1215년 징기스칸이 세운 몽고 제국이 중국 대륙을 점령하면서 네스토리우스파의 중국 선교가 재개되었다. 페르시아와 몽고는 지리적으로 가까워 일찍이 네스토리우스파 신앙이 몽고 황실에까지 들어갔는데 징기스칸의 부인과 딸 중에 네스토리우스파 신앙을 가진 이들이 많았다. 이런 관계로 징기스칸의 손자 쿠빌라이가 중국 북경을 점령하고 1272년 원나라를 세울 때 네스토리우스파 신도들이 대거 북경으로 들어갔다. 이로써 네스토리우스파 신앙이 다시 중국에서 유행하게 되었는데 원나라 때 네스토리우스파를 ‘야리가온’(也理可溫)으로 불렀다. 당나라가 ‘경교’를 보호하였듯, 원나라 정부도 ‘야리가온’을 보호하였다. 그 결과 원나라가 망하기까지 150여 년 동안 네스토리우스파는 중국 전역에 ‘십자사’(十字寺, 교회)를 세우며 크게 유행하였다. 그러나 당나라 때 경교와 마찬가지로 야리가온도 원나라가 망하면서 함께 소멸되었다. 침략자와 함께 들어온 ‘외래 종교’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5.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의 중국 선교

징기스칸의 몽고제국은 동쪽으로 중국 뿐 아니라 서쪽으로 페르시아와 터키를 거쳐 유럽 대륙까지 침공하여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 무렵 로마 가톨릭교회와 유럽 국가들은 십자군 운동을 벌여 터키와 팔레스틴의 이슬람 세력과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몽고 세력의 서방 진출에 위협을 느낀 유럽 국가들은 로마 교황청을 내세워 몽고 제국과 평화를 도모하였다. 이에 로마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는 1246년 동방 선교에 열의를 갖고 있던 카르피니(Carpini) 등 프란체스코수도회 수도사 4명을 몽고에 파송하였다. 카르피니 일행은 몽고 카라코룸에 도착하여 징기스칸에게 교황의 친서를 전했고 그곳에서 네스토리우스파 교회의 실체를 목격하였다. 카르피니는 로마로 귀환하여 ‘이단’인 네스토리우스파의 세력 확산을 막기 위해서라도 로마 가톨릭교회의 중국 선교가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이에 1250년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루부룩(Ruburuck)과 바돌로메나(Batholomena)가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의 지원을 받아 중국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이들은 카라코룸에 도착하여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먼저 들어와 있던 네스토리우스파와 많은 갈등을 빚다가 2년 만에 돌아가고 말았다.
몽고족이 1272년 중국 북경을 점령하고 원나라를 세운 이후 로마 가톨릭교회는 본격적으로 중국 선교에 착수하였다. 특히 그 시기 중국을 여행한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가 유럽에서 간행되면서 중국 선교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였고 1289년 로마 교황 니콜라이 4세는 몬테 코르비노 요한을 선교사로 중국에 파송하였다. 그는 이후 20여 년 북경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폈으나 네스토리우스파 신도들의 저항과 방해를 받아 큰 업적을 이루지는 못했다. 로마 교황청은 중국교구를 설정하고 이후에도 선교사들을 계속 파송하였으나 너무 거리가 멀어 중국에 도착하기도 전에 죽거나, 중국에 도착하자마자 질병으로 죽는 경우가 많았고 네스토리우스파의 방해까지 받아 제대로 선교 활동을 펴지 못했다. 결국 원나라 때 중국에 네스토리우스파와 로마가톨릭교회가 동시에 선교사들을 파송했으나 두 교회는 ‘에베소공의회 앙금’을 극복하지 못하고 갈등과 대결을 일삼아 선교의 열매를 거두지 못했다.

6. 종교개혁 이후 로마 가톨릭교회의 아시아 선교

루터의 종교개혁(1517년)으로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회)는 해체 위기를 맞았으나, 예수회(Jesuits)를 중심으로 강력한 신앙 쇄신운동(counter-Reformation Movement)을 전개하여 위기를 극복하였다. 예수회 운동은 절대 청빈과 절대 순종, 절대 순결이라는 수도원 운동의 3대 기본 원칙을 강조하며 강력하게 교회 개혁운동을 전개하였고 과학과 신앙의 조화, 해외 선교 활성화를 꾀하였다. 1520년 창설된 예수회를 비롯하여 도미니쿠스회, 베네딕투스회, 아우구스티누스회 등 오랜 역사를 가진 수도 단체들이 아직 기독교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지역에 선교사들을 파송하였다. 이런 수도단체의 해외 선교를 스페인과 포르투갈 같은 가톨릭 국가들이 적극 후원하였다. 16세기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이들 가톨릭 국가들은 우수한 항해술을 발판으로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아시아 지역 신대륙에 식민지를 건설해 나갔는데 그 과정에서 가톨릭교회 선교사들의 해외선교가 병행된 것이다. 같은 가톨릭 국가임에도 서로 경쟁관계에 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이해 충돌을 피하기 위해 로마 교황청은 서경 30도 선을 경계로 동쪽은 포르투갈, 서쪽은 스페인에게 식민지 개척과 해외선교의 책임을 맡겼다. 이로써 인도를 비롯하여 동남아시아 지역은 포르투갈의 식민지와 선교 구역이 되었다. 스페인은 아메리카 대륙과 태평양을 건너 일본과 필리핀에 이르렀다. 그 결과 인도와 중국, 일본과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들은 유럽 국가의 식민 침략과 가톨릭 선교를 함께 체험하였다.
이런 배경에서 예수회 창설자였던 사비에르(F. Xavier)는 포르투갈 국왕의 지원을 받아 1541년 인도 고아에 도착, 선교 활동을 시작하여 8년 동안 10만 명 교인을 얻었다. 인도 선교를 성공적으로 개척한 사비에르는 1549년 일본 남부 가고시마에 도착하여 일본 선교를 시작하였다. 당시 일본은 전국시대 말기여서 강력한 무기가 필요했던 무사와 영주들은 포르투갈과 스페인 무역선을 타고 온 예수회 신부들과 그들이 가지고 온 서양 무기와 기물에 관심을 갖고 선교사들의 상륙과 포교 활동을 허락하였다. 이후 가톨릭교회는 급속히 무사 계급을 중심으로 농민과 하류층에 확산되었는데 이 시기 가톨릭 교인들을 일본에서는 ‘기리시단’(切支丹)이라 불렀다. 그러나 정권을 장악한 도쿠가와는 기리시단이 외국 침략의 선봉이자 통치의 방해 세력이 된다고 생각하여 1623년 기리시단 금압령을 내려 가톨릭 선교사들을 추방하고 대대적인 탄압과 박해를 가했다. 이후 일본의 가톨릭교회는 멸절 상태에 처하였다.
한편, 인도에 이어 일본 선교도 성공적으로 개척한 사비에르는 아시아의 중심인 중국 선교를 계획하고 1552년 중국으로 출발, 중국 남해 상천도에 상륙하였으나 곧바로 별세하여 중국 선교의 꿈은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회 선교사들이 뒤를 이어 중국 대륙에 상륙하여 선교를 개척하였으니 대표적인 인물이 마테오 리치(Matteo Ricci)다. 1583년 중국 광동에 도착한 리치는 중국 선비들의 유교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토착화’ 전술로 중국 선교에 임해 황제와 지배계층의 환심을 사는데 성공하여 1595년 북경에 들어가 명나라 황제의 지원을 받아 북경 네 곳에 교회를 세울 수 있었다.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환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가지고 온 서양의 과학 기술과 문명 때문이었다. 대부분 과학자들이었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뛰어난 과학 기술로 중국 지배층의 환심을 샀고 이를 배경으로 선교 활동을 펼쳐 나갈 수 있었다. 이 같은 분위기는 만주족이 명나라를 함락시키고 청나라를 세운 1644년 이후에도 한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중국 선교에 뒤이어 참여하게 된 도미니쿠스회, 베네딕투스회 등 보수적인 선교단체들은 중국 전통 문화에 타협적인 예수회의 선교 정책을 비난하며 서구 가톨릭교회 전통을 그대로 중국에 이식하려 하였는데, 이 때문에 선교 단체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고 로마 교황청은 예수회를 해산시킴으로 중국에서는 보수적 선교단체에 의해 공세적이고 배타적인 선교가 이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청나라 정부도 선교사들의 침략적 행위를 빌미로 1720년 선교사들을 추방하고 선교 활동을 금지하였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천주교회도 멸절 상태에 처했다.

7. 프로테스탄트교회의 아시아 선교

서구 유럽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의 해외 선교는 18세기 접어들어서야 시작되었다. 종교개혁 이후 거의 2백 년 동안 신앙과 교리 확립을 위한 신학 논쟁으로 보낸 유럽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17세기 중반 이후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난 경건주의(pietism) 운동으로 신앙의 활력을 회복하고 로마 가톨릭교회들이 독점하고 있던 해외 선교지역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 사이 포르투갈과 스페인 등 가톨릭 국가들의 지도력도 추락하여 이들의 해상 지배권은 영국과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등 프로테스탄트 국가에 넘어가고 있었다. 이런 배경에서 유럽의 프로테스탄트 국가와 교회들의 식민지 개척과 해외 선교가 추진되기 시작했다. 로마 가톨릭 국가와 교회들의 전례를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이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이로써 1600년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인도는 영국 식민지로 바뀌었고 그와 함께 동인도회사의 지원을 받은 영국성공회 선교사들이 인도에 도착, 프로테스탄트 선교를 시작하였다.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같은 운명이어서 과거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 지배와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던 아시아인들은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의 식민 지배와 함께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받아들였다.
중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1720년 선교사 추방령 이후 가톨릭교회의 선교는 사실상 중단되었으나 그 시기 중국에 진출하여 광동성을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던 영국 동인도회사와 연계된 영국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이 기독교 선교를 재개하였다. 특히 동인도회사의 아편 무역을 빌미로 일어난 1840년의 아편전쟁에서 패한 중국은 무방비 상태로 서구 국가들에 문호를 개방하였고 이를 계기로 유럽과 미국의 여러 나라 선교사들이 중국에 진출, 19세기 말에는 중국 대륙 전체에 교회가 확산되었다. 그러나 외세 침략과 함께 들어온 프로테스탄트교회 선교사들을 보는 중국 인민들의 반응은 우호적이지 않았다. 1900년 서구 열강국의 경제 침략을 규탄하는 대대적인 민중 봉기가 일어났을 때 많은 선교사와 기독교인들이 살해당하였고 1920년대 이후 공산주의 운동이 일어나면서 기독교는 오랜 박해와 침묵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일본의 경우도 유사하였다. 도쿠가와 막부 통치 기간(1603-1868년) 중 기리시단 금압령으로 선교는 중단된 상태였으나 막부 권력이 약화된 1853년, 미국 군함 페리호가 일본 요코하마항에 나타나 무력시위를 벌이며 개항을 요구하자 일본은 저항하지 않고 항구를 열었다. 1867년 일본의 신진 무사세력은 메이지유신을 단행하여 천황제(天皇制)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한 전체주의 국가를 수립하였는데, 메이지 정부는 정치에 간섭하지 않는 한 서구 국가들의 선교 활동을 허용하였다. 새 정부도 선교사들이 가지고 들어온 서구 문화와 문명에 호감을 가졌다. 이로써 일본에서 프로테스탄트 선교가 시작되어 미국과 유럽의 여러 교파교회에서 경쟁적으로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기독교를 문화적 양식으로 인식하고 종교적인 접근을 하지 않았다. 대부분 서구 선교사들도 일본의 전체주의, 군국주의 정치 세력과 타협하며 일본 문화에 접근하였다. 그 결과 기독교는 일본인들의 마음 깊은 곳을 침투하지 못하였고 선교 150년이 넘었음에도 전 국민의 1% 미만이라는 교세를 기록하고 있다.

8. 한국 교회의 아시아 선교 과제

지금까지 아시아에서 이루어진 기독교 선교의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제 아시아 선교를 이야기하기 전에 아시아에서 전개된 기독교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아시아 국가들은 유럽보다 먼저 기독교를 체험하였다. 이미 성서시대 복음은 아시아(팔레스틴)에서 발원하였고 사도시대 아시아(터키)를 거쳐 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아시아 교회는 비록 초기 교리논쟁과 종교회의에서 아시아의 동방교회 전통이 ‘이단’으로 정죄되어 로마제국 밖으로 추방되었지만 시리아와 페르시아를 거점으로 ‘동방 선교’를 중단하지 않았다. 도마와 네스토리우스의 인도 및 중국 선교는 그 대표적인 예다. 더욱이 7세기 이후에는 이들 지역 교회들이 이슬람의 강력한 탄압과 박해를 견뎌내면서 역사의 맥을 이었다. 중세 가톨릭 교황과 국왕 및 제후들의 강력한 지지와 보호를 받으며 ‘기독교 왕국’을 건설했던 유럽의 교회와는 비교할 수 없는 고난과 수난의 역사 체험이었다. 종교개혁 이후에는 유럽의 로마 가톨릭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의 식민 침략과 함께 선교를 체험하였다. 그 결과 아시아인들의 기독교 경험은 유쾌한 것은 아니었다. 제국주의 침략과 함께 진행된 기독교 선교의 역사에서 아시아인들은 굴욕과 아픔을 느꼈다. 아시아인들에게 기독교는 공세적이고 거만하며, 배타적이고 물질적이며, 폭력적이고 침략적이었다.
한국 교회는 이런 역사적 배경과 체험을 이해하면서 아시아 선교를 준비해야 한다. 무엇보다 한국교회는 서구 교회의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선교 정책과 방법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아시아인들은 오랜 역사와 문화를 갖고 있어 자존심이 강하다. 그래서 아시아 선교는 아시아식(式)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아시아인을 아시아인이’(Asian to Asian) 전도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경교’나 ‘야리가온’, ‘기리시단’과 ‘예수회’가 아시아 선교에 실패한 이유는 유럽들이 가져온 기독교가 아시아에서 ‘외래 종교’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시아인들의 눈에 기독교는 ‘서구’ 종교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 선교’의 역사적 체험과 신앙 전통을 갖고 있는 한국 교회가 아시아인의 시각과 방법으로 아시아에 복음을 전할 때 파란 눈의 서양인 선교사보다는 훨씬 유리할 수 있다.
그리고 한국 교회는 서구 국가들의 침략과 지배로 인해 입은 아시아인들의 깊은 상처를 치유하는 것으로 아시아 선교에 임해야 한다. 근세 이후 아시아 국가들이 체험한 서구의 물질과 폭력으로는 아시아인들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섬김과 사랑만이 상처 입은 영혼을 치유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한국 교회는 아시아 선교에 유리한 체험을 갖고 있다. 한국의 기독교 체험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달랐다. 우리 민족은 외세(일본)의 침략과 지배 현실에서 기독교를 접하였고, 복음이 주는 위로와 자유, 정의와 평화를 체험하였다. 따라서 한국인들의 기독교 체험은 침략자의 종교가 아니라 고난당하는 자의 복음이었다. 이 점에서 한국 교회는 역사적 아픔을 갖고 있는 아시아 민족에게 위로와 치유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선교 국가이다. 강탈과 살육, 폭력과 고통이 난무하는 여리고 골짜기에서 ‘선한 사마리아인’(눅 10:37)이 보여주었던 자비와 사랑만이 상처 입은 아이사인들을 치유하고 그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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