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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의 선교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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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wscs 작성일 10-09-30 17:24 조회 1,987 댓글 0
 
 

1)개략적 선교현황

전 세계는 방글라데시를 기아, 빈곤 그리고 인구과잉의 나라로 생각한다. 방글라데시가 거의 200년 동안이나 홍수와 폭풍, 기근에 시달려 왔기 때문이다. 1970년대만 하더라도 자연재해나 전쟁 그리고 기아로 죽은 사람이 150만명이 넘는다.

혹시 풍년이 든다고 할지라도 나라 인구 전체를 먹여 살릴 수 없을 정도이니, 방글라데시의 재난들은 어떠할 까 가히 짐작할 수도 없다. 그리고 여전히 인구는 하루에 6,000,명씩 늘어만 가고 있다. 정부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외국의 원조에 의지하여야만 하는 실정이다.

방글라데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 여전히 저항적이다. 국가의 공식 종교가 이슬람교로 전체 인구의 87%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발표에 의하면, 방글라데시 내 현재까지 정식 등록된 NGO는 총 802개이고, 이중에 81개의 NGO가운데 427명의 외국인이 장기비자를 받아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이들 중에 얼마나 기독교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지, 특별히 구제사역이 아닌 직접적인 복음사역에 관계되어 사역하는 선교사가 얼마인지는 정확하게 파악되고 있지 않다.

기독교의 구제활동을 정부에서 중요시 여기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한 적극적인 반대는 아직 없는 편이다. 그러나 선교사의 정식입국을 금지하는 등 새로운 장애물이 기독교의 복음선교에 지장을 초래하고 있다. 방글라데시는 뱅갈인이 90%로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비하리 뱅갈인이 8%이며, 그리고 다른 소수 부족민들이 2%가량 차지하고 있다. 이런 주민들은 다시 종교와 계층에 따라 세분화된다. 방글라데시를 복음화시키려면 이런 부족에 대해 그 특징과 그 집단에 대한 연구를 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각 집단들은 서로 분리된 것으로 다루어야 하며, 이들은 복음을 받지는 못했으나 대부분 복음에 대해 개방적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복음에 대해 가장 저항적인 집단은 뱅갈과 비하리의 이슬람교도들이다. 이들은 방글라데시에서 독특한 사회를 형성하여 왔다. 비록 이슬람교가 평등을 주장하여 계급을 인정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방글라데시의 이슬람교에는 아쉬람(상류층), 아즈람(평민), 그리고 아르찰(천민)등의 계급이 나뉘어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속에서도 쿠스틴 같은 지역은 개종자들이 많이 있으며, 성경통신강좌를 원하는 이슬람교도들도 계속 늘어나고 있어 복음선교에는 고무적인 일이 되고 있다.

힌두교 벵갈인은 모두 25계급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중 4계급이 복음을 잘 받아들이고 있다. 개방적인 계급만을 집중적으로 사역한 선교회는 상당한 성장을 보였으나, 그렇지 않은 교회나 선교회는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들은 기독교인이 되면 이슬람교와 힌두교 문화에서 소외당하기 때문에 그들의 생계를 선교단체에 의존하게 된다.

그렇지만 단일 부족이나 계급에 집중하여 그 상황에 맞는 정책을 실시하고 있는 선교단체나 교회는 큰 성장을 이루어 가고 있다. 특히 부족민들의 선교에 이 전략은 매우 큰 성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방글라데시에 있어서 기독교는 천재지변과 기근 등에 대한 구제활동 덕분에 호의를 얻고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선교사들이 형편상 대도시에 몰려있어 복음 선교사 비효율적이 되어 가고 있다. 이에 따라 복음에 대해 개방적이면서도 아직 복음이 전파되지 아니한 국경지역의 소수부족들과 나마수드라 계급이 간과되고 있다. 나마수드라의 많은 마을에서는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원하고 선교사 파송을 요청하고 있지만 파송된 선교사가 부족한 실정에 있다.

기독교의 구제 및 개발사업은 방글라데시에서 복음전파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병원과 약품보급소, 그리고 나병치료소와 가족계획기구가 운영되고 있으며, 아동보호, 농업개발 및 직업훈련 등에도 여러 선교단체들이 참가하고 있다. 덕분에 이슬람교 국가인 방글라데시 정부에서도 기근과 황폐 그리고 재난마다 도움을 베푸는 이 손길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언제 이런 상황이 사라질 것인지는 예측할 수 없다. 현재 방글라데시의 그리스도인 숫자는 현재 총인구 대비 0.44%(개신교 0.23%, 카톨릭 0.21%)로 매년 3.65의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 이중에 복음적인 그리스도인은 0.08%밖에 되지 않는다.


2)한국교회의 방글라데시 선교 현황

한국교회의 방글라데시 선교는 1974년 8월 고 정성균선교사(장로교 통합, 1978년 추방당한 후 파키스탄에서 사역 중 1984년 7월 과로로 인한 만성B형 간염으로 사망)가, 당시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로서 한국에 파송받아 광주제중병원을 중심으로 26년간 사역하다가 제2의 사역지로 방글라데시로 정하고 활동 중이던 미국인 “코딩턴”(의사) 선교사의 초청으로 첫 박을 내딛음으로 시작되었다.

정성균 선교사는 이듬해 1975년 총회 정식선교사로 파송받고 다카 시민교회와 바타라, 색디, 대무라 난민수용소 교회 등을 설립하고 바타라, 매률, 페루리아 국민학교를 설립하였으며, 개인전도와 구제사업에도 힘썼고 현지 교역자 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 방글라데시는 독립한 지 3년 밖에 안된 신생독립국으로 모든 것이 정리되지 아니하고, 어수선한 상황이었으며 이로 인하여 한국교회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았다.

그에 따라 1977년도에는 오메가선교회의 파송으로 J선교사가 여성으로 단독 입국하여 사역을 시작하였고, 그 이듬해인 1978년 J선교사와의 결혼과 함께 J선교사가 입국, 부부가 함께 신학교를 중심으로 현재까지 사역하고 있다.

이어서 1979년 전주예수병원 파송의 의료선교사인 이용웅(내과) 선교사가 입국하여 7년의 사역을 마치고 귀국하였으며, 1980년 6월에는 박혜인 간호선교사와 송희천선교사가 입국하여 사역했다.

그러나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씩 한국선교사가 늘어나지만 늘 상존하는 어려움은 신생독립 국가로서 강력한 이슬람종교정책을 펴나가는 정부에 대항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는 점이다. 오랜 선교의 전통을 갖고 있는 서구 선교단체들은 그러한 모든 일들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과 대응책을 가지고 있었지만, 당시 걸음마 단계에 있었던 한국교회로서는 단순히 한 두명의 선교사들을 현장에 던져 놓는 것으로 만족했던 단계로 사후대책이나 전략이 전무한 상태였기 때문에 초창기 한국 선교사들이 받는 심적 정신적인 고통과 곁들여 충분하지 못했던 선교비로 인한 경제적인 고통도 또한 컸었다.

그러던 중 84년 이후에 각각 다른 루트를 통해 입국하여 사역하던 C선교사 외 몇 명의 선교사가 한국연합선교회를 조직하기로 결정하고 일을 추진하여 87년 7월 뱅갈정부에 한국방글라데시개발협회라는 이름으로 5개의 선교사역(농업, 의료, 봉제, 음악, 나환자)와 44명의 비자시트를 신청한 결과, 90년 1월 정부로부터 등록허가와 총 37개의 비자시트를 받았으며, 93년부터는 교육사역가 추가된 초교파적인 선교단체로 현지인들의 지도력 개발과 현지교회 및 현지신학교 지원, 기도원, 농촌 지역 개발, 농군학교, 국제 음악학교, 컴퓨터 및 봉제기술 교육, 병원, 나환자 재활촌, 초등학교 사역 등의 선교 활동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또한 89년 입국하여 치타공에 사역지를 정한 예수전도단의 J선교사가 91년 4월 30일에 불어 닥쳐 수많은 인명피해를 내었던 사이클론으로 인한 구제사역을 통해 그 지역에 한국인의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면서 뱅갈지역 구제 개발기구 라는 이름으로(고아원, 교육사역) 등록하고 활동하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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