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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의 선교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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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wscs 작성일 10-09-30 17:23 조회 1,990 댓글 0
 
 

1. 천주교의 기독교 전래

  방글라데시의 카톨릭의 전래는 그 역사와 마찬가지로 인도로 소급하여 올라가야 한다. 인도에 카톨릭이 소개되기는 이슬람교가 왕국을 세워 이슬람공동체를 형성해가는 13세기부터라고 하는 것이 좋다. 13세기 이전의 카톨릭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13세기 말 이슬람교도들이 카톨릭 교회의 수도사들이 중국으로 향하는 길을 막자, 이들은 해로를 이용하였는데 이때 잠깐씩 인도에 체류할 기회를 갖고 동태를 살피곤 하였다.

  1289년에는 교황 니콜라스 4세가 극동에 요한을 사절단으로 파견하였는데, 중국으로 가는 도중 인도에서 전도를 하여 약 100명이 결신자들에게 세례를 준 일을 시작으로 이들은 인도에서 복음의 씨를 뿌리면서 인도의 기독교선교에 관심을 가졌다.

1300년이 되면서 프란시스코와 도미니크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으나, 이들은 이슬람교도들로부터 불의의 습격을 받고 순교를 당했다. 1322년 프란시스코 선교사 오도릭 페드레느베는 도미니크 선교사 죨단이 순교한 지방에 방문을 하였고, 1344년에는 교황 베네딕트 12세의 사절이었던 마노리가 인도를 방문하면서 선교의 명맥을 유지하였다.

1448년에는 바스코다가마 일행이 고아, 코친 등의 작은 지역에서 포르투갈의 힘으로 그 곳 주민들에게 기독교인이 되도록 강요하였다.

1500년에는 프란시스코 선교사 8명, 1503년에는 도미니크 선교사 5명이 들어오는 등, 계속 많은 선교사가 들어오면서 고아에서 예수회를 조직하였다. 사비에르 선교사는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와 손을 잡고 아시아 선교의 기반을 세우면서 카톨릭 선교의 새로운 발전을 마련했는데, 그는 어부들을 위해 해안에 교회를 창설했고, 세상을 떠난 1552년까지 순회전도 여행을 하였다. 그의 선교의 열정은 다른 선교사와 일반 교인의 신앙에 큰 자극과 격력를 주어 인도 선교의 불길을 일으킨 동기가 되었다.

1601년부터는 아르레니아 상인들과 군인들, 그리고 예술가들이 들어와 라호르에 정착하여 교회를 세웠고, 한명의 주교가 있기도 했다. 1605년에는 로베르트 노버리가 선교를 하기 시작했는데, 하층민을 상대로 했던 선교방향에서 차츰 상류계습의 개종을 시도하셨다. 그는 브라만계급과 같은 생활을 하면서 친근감을 주는 데에 성공하여 브라만계급의 독자적인 교회를 설립하면서 38년 동안 600명 정도의 상류계급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성과를 거두었다.

1601년에 라호르에 정착한 아르메니아 사람들은 1700년대에 무갈의 군대로 활약하기도 하였으나 1750년 이후 그 공동체는 쇠퇴해졌다. 1714년부터 다카에 있던 아르메니아인들도 1781년에 아름다운 교회를 세우고, 황마무역을 시작했지만 그 세력은 미미했다.


2. 개신교의 기독교 전래

1)개략적 선교 역사

포루투갈 정부의 식민정책에 대한 반발은 기독교의 비난으로 번졌고, 포루투갈인에 대한 감정은 기독교 선교에 지장을 가져오게 되었다. 포루투갈에 대체하여 진출하기 시작한 프랑스와 영국은 패권다툼을 하였고 이때부터 개신교 선교활동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인도의 기독교 선교는 덴마크의 프리데릭 4세가 1706년에 그의 관할지역인 트랑케바르에서 활동할 선교단을 창설하면서 부터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은 대부분 할레 선교회에 속한 선교사로서 할레 선교회는 이지켄 발크와 플푸차우 외에도 56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이중 이지켄 발크는 신약과 구약의 이부를 타미르어로 번역하여 인도선교의 시반을 다졌으며 그후 술제가 1724년 구약을 번역하였다. 술제는 공용어인 힌두스타니어로 성경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1744년에는 교황 베네딕트 14세가 교서를 내려 하급 카스트에 대한 차별대우를 없애기도 하였다. 1750년에 1798년까지 루터팡의 슈바르트는 동인도 회사의 전속으로 일하며 선교사들이 박해를 받는 시기에도 탄죠르에서 많은 개종자를 얻었다. 그러나 이후의 기독교의 선교는 부진해졌다.

18세기가 되자, 이슬람교는 개혁운동을 벌이며 새로운 일을 과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와 영구의 세력다툼에서 영국이 주도권을 쥐게 되자 1703년 윌리암 케리가 들어가 기독교 선교의 기반을 다졌다. 그는 다니푸르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기는 했으나 선교사의 거주문제로 벵갈의 염료공장에서 일하면서 37개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일에 힘썼다.

이어 19세기에 들어가면서 개신교 즉 기독교 선교는 급속도록 화장되어 갔다. 인도의 감정에 예민했던 동인도 회사도 그 유화 정책의 일환으로 선교사 거주와 활동의 제한을 1813년에 철페하였으며 켈커타에는 국교회의 감독 교회설치가 허락되엇다. 이렇게 되자 윌리암 케리는 소수의 선교사들로는 복음의 확장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지도자 양성을 위해 1819년 세랑포드에 신학대학을 세웠으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이후 1920년에 비숍 칼리지가 개설되엇고, 1930년에는 스코틀랜드의 알렉산더 더프가 상류사회에 대한 목표를 갖고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교육기관을 세워 영어로 교육을 실시하였는데 이 선교전략은 큰 성과가 있었다.

1947년부터의 활동은 작은 종족간에는 전개되었으나 인도의 독립과 파키스탄의 독립, 그리고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의 분리독립 등 정치와 종교적인 국내 혼란으로 선교의 불길은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방글라데시는 이슬람 국가이면서도 힌두교도 상당히 존재하므로 기독교에 대한 개개인의 관심은 부정적이라고는 볼수 없다.


2)윌리엄 캐리를 중심으로 한 개신교 선교 역사

근대 개신교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캐리가(1761-1834), 그락 인도 선교를 시작한 지 200여년이 지난 오늘날 그의 선교를 한국교회의 선교적 상황 속에서 재조명해 보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현재의 방글라데시로 일컬어지는 지역에서의 기독교의 선교는 카톨릭보다 200년이나 늦은 1793년 11월 11일 윌리암 케리의 입국으로 시작되었다. 윌리엄 케리가 남쪽 지역에 있는 보리샬이라는 지역에 처음 선교 캠프를 차리고 선교 시작, 현재 전국에 약 800여개의 교회와 기도처가 있다. 한국교회의 선교는 1974년 고 정성균 선교사로부터 시작되어 현재는 40여명의 선교사들이 사역을 하고 있다.

윌리암 케리는 1793년에 영국의 최초 해외선교 파송중개소로 1792년에 설립된 침례교선교 협회에 의해 파송되어 벵골지역에서 사역을 했다. 그리고 1795년에 현재의 방글라세디시 내에 있는 디나즈푸르에 침례선교협회 선교지국을 설립했다. 방글라데시의 수동니 다카에는 1816년에 선교지국이 개설되었다.

무엇보다도 윌리엄 캐리의 가장 위대하고 지속적인 공헌은 뱅갈어로 성서를 번역한 일이다. 이것은 200년 앞서 들어온 카톨릭 선교사들이 착수하지 못했던 중요한 업적이었다. 거의 200년이 되는 세월동안 침례교선교협회의 사역은 뱅골지역에서 이슬람교와 힌두교들 사이에 계속되었다. 이를 토대로 설립된 현재의 방글라데시 침례교 연합은 약 2만명의 공동체 회원을 가져 방글라데시의 가장 큰 기독교단체가 되기도 했다. 윌리엄 캐리가 활동한 이래로 다른 여러 침례교 단체들이 계속해서 선교사역을 담당했다.

영국의 침례교 이외에도 오스트레일리아 침례교선교회가 1882년 사역을 시작했고, 인도 아샘지방 경계에 살고 있던 주민들에게 독특한 호응을 얻어 바로 침례교 연합을 형성했다. 뉴질랜드 침례교는 1886년에 들어와서 대규모의 기독교 문헌 중개소가 되었고 이들은 모두 침례교연합과 관련을 맺고 있다.

미국의 침례교는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세계복음화를 목표로 1956년 치타공에 도착하여 복음주의적 교회설립사역을 시작했다. 미얀마(버마)국경에 인접한 방치된 남부지역에서의 의료선교로 그들의 사역을 확장시키고 있다. 스웨덴 침례교선교사들도 사역을 개시하엿다. 교회선교사회인 성공회단체에서도 1805년에 사역을 시작하였고, 영국장로교는 1862년 성공회로, 옥스퍼드선교회는 1895년에 들어왔다. 루터교의 사역은 19세기 말에 시작되어 서쪽 국경지방인 산탈리 부족에서 진행되었는데, 이들은 기독교신앙에 대해 상당히 호의를 보여 노르웨이, 덴마크, 미국으로부터 온 여러 루터교회와 선교단체들이 협력해서 선교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웨일즈장로교에 의해 시작되 북동 벵골의 국경지대의 가로족 주민들에게 선교사역을 하기도 하였다.

20세기초에는 오순절교회와 비오순절교회의 미국선교사들이 들어왔으나 오히려 교회단체들을 분리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치타공 힐트랙스에 있는 복음주의교회는 여행이 제한된 지역에 있는데, 1918년에 바움으로 알려진 부족단체에서 시작된 북동 인도총선교회에 의해 실행된 선교사들이 사역해서 이룬 결과이다. 이 교회는 독립하여 그들 자체의 관할구와 교회운영을 하면서 활동하고 있다. 국제적인 선교회는 국제기독교친교회로, 1958년 파키스탄으로 들어와 현재는 방글라데시에서겅경통신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1970년과 1971년에 이은 폭풍우의 참화와 내전으로 시달린 방글라데시는 세계의 관심으 모으면서 이전에는 선교하지 않았던 나라의 선교단체들로부터도 의료와 구조를 받게 되었는데, 인도선교협회, 구세군, 세계기독교선명회, NAE의 세계구조위워뇌, 의료원조회, 성서와 의료선교협회, 독일의 박애선교회 등이 그런 단체이다.

이러한 기독교의 동정과 관심의 대상이 된 방들라데시는 복음의 어장이 될 가능성이 많다. 내전으로 인한 참사와 궁핍, 홍수, 폭풍의 재난, 그리고 무지에 시달리는 방글라데시의 어려움을 돕는 기독교 선교단체의 호의는 오랫동안 무관심하고 방치되었던 방글라데시에 새로운 선교의 장을 열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런 기회가 주어져 있을 때, 그리고 더 늦기 전에 방글라데시에 대한 새로운 선교의 장을 열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런 기회가 주어져 있을 때, 그리고 더 늦기 전에 방글라데시에 대한 선교의 열정과 불길이 타올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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