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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 나라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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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wscs 작성일 10-09-30 17:20 조회 1,495 댓글 0
 
 

Ⅰ. 방글라데시의 모습

-방글라데시 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Bangladesh)

-면적: 14만 7,570㎢

-인구: 1억 3337만 명(2002)

-평균수명: 남 60.4세(1996년)/여 59.91(2000년)

-수도: 다카(Dhaka)

-통화: 방글라데시 다카(TK)

-공용어: 뱅골어

-종교: 이슬람교, 힌두교

-국민소득: 국민총생산 350달러(1998)/ 1인당 240달러(1995년)


1. 방글라데시의 지리적 위치

인도반도의 동쪽 끝에 있는 나라, 정식명칭은 방글라데시 인민공화국, 동북서쪽은 인도에 둘러싸여 있고, 남동쪽은 미얀마와 접하며, 남쪽은 뱅골만에 면한다. 방글라데시란 벵골어로 “벵골의 나라”를 의미하고, 1971년 3월 파키스탄에서 분리 독립하였다.


2. 방글라데시의 자연 환경

국토의 대부분은 갠지스강과 브라마푸트라강이 형성하는 충적지대이다. 이 2대 하천은 이 나라의 중앙부에서 합류해서 그 남쪽은 대소무수의 하천만을 이뤄 벵골만으로 흐른다. 남동부의 치타공 구릉지대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이 낮은 평지로, 우기에는 하천의 범람으로 국토의 약 2/5가 수몰된다. 전 국토는 아열대성 기후로 고온다우하며, 연평균 기온은 25~26C, 연강수량은 전 지역에서 1,600mm를 초과하며 우기(5~10월)와 건기(11~4월)로 나누어진다. 지리적 구분은 남서부, 북북, 중앙부, 남동부의 4지역으로 구별할 수 있다. 브라마푸트라강 서쪽의 남서부는 저지 삼각주 지대로 하구 부근은 순다르반이라고 불리는 저습인데, 관목림이 펼쳐지며 벵골 호랑이가 서식한다.

중심도시는 쿨나이며 그 밖에 철도, 항공의 요충지인 제소르, 항만도시 찰나가 있다. 북부는 고지의 건조 지대인데, 벼농사 외에 밀, 담배 등을 재배한다. 북동부의 실헤트 부근은 인도의 아삼 지방 다음가는 차의 생상지이다. 그 밖에 라지샤히, 파브나, 디나지푸르 등의 도시가 있다. 또 다카의 근교에는 나라양간지, 퉁기 등 이 나라 최대의 공업지대가 펼쳐진다. 남동부는 벼농사 지대와 구릉이 펼쳐져 있으며 치타공을 중심으로 코밀라, 노아칼리 등의 도시가 있다. 치타공 구릉에는 유일한 수력발전소가 있고, 치타공 이남의 해안부에는 어업이 성하다.


3. 방글라데시의 민족과 문화

주요민족은 벵골족으로 전체의 98%를 차지한다. 벵골족은 남인도에서 북상한 민족인 드라비다계와 티베트계화의 혼혈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인도 아리안 계통인 사람도 적지 않다. 공용어는 벵골어이고 문자는 산스크리트계이다. 성인의 문맹률은 61.9%(1995), 아동의 취학률은 정부의 노력으로 90년대 초부터 취학률이 높아졌으나 대체적으로 교육수준은 낮은 편이다. 종교는 이슬람교도가 87%를 점유하고, 힌두교는 12%이다. 양자의 대립관계는 뿌리가 깊어 사회불안 요인의 하나가 되고 있으며, 또 불교도가 치타공 부근에 거주하고 있다. 이 나라 최대의 사회문제는 인구문제인데, 인구증가율은 연 1.59%에 달하고 있다. 출생률은 1000명당 25.44명이고 사망률은 8.73명이다. 그중 영아 사망률은 71.66이다. 현재 인구 억제는 식량문제의 해결과도 관련되어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으나 진척은 완만하다.


4. 방글라데시의 역사(독립과정)

파키스탄은 1974년 영국 지배를 벗어나 인도를 사이에 끼고 징검다리 국가로서 탄생하였다. 그로부터 파키스탄은 서파키스탄이 동파키스탄을 정치, 경제면에서 지배하는 체제를 유지하였다. 독립 이래 동파키스탄에서는 서파키스탄을 토대로 하는 파키스탄 정부에 대해 자치요구 운동이 일기 시작하여 49년에는 아와미(인민) 연맹을 발족시켰다. 동파키스탄의 자치 요구운동의 이데올로기적인 기반은 파키스탄 자체의 건국이념으로서의 라호르 결의(1940년 3월)에 두고 있었는데, 그 결의에서는 동파키스탄의 자치권과 주권이 보장되어 있었고 동파키스탄인의 대다수를 구성하는 벵골(방글라) 민족의 자결권이 인정되고 있었다.

그러나 역대 파키스탄 정부는 동파키스탄은 몰론 서파키스탄을 구성하는 신드, 사시툰, 발로치의 3민족의 자치권을 옹호하는 형태의 정책조차 제기하지 않았고, 아유브 대통령 시대(1962-69)에도 탄압정책은 속행되고 있었다. 아유브를 뒤이은 야히야 대통령의 동파키스탄 민심 장악에 실패하여, 71년 3월 동파키스탄의 다카를 중심으로 정부군과 도시주민 사이에 무력충돌이 발생하자 파키스탄은 일거에 내란 상태가 되어 버렸다.

벵골 민중의 자치요구 운동은 자결요구 운동으로 크게 비약되었고, 71년 11월 벵골 민중의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파키스탄의 국가적인 위신에 타격을 주기 위해 인도군이 동파키스탄 진격을 개시하여 일방적인 인도군의 승리를 얻었다. 이로써 동파키스탄은 해방을 얻어 12월 방글라데시 인민 공화국을 발족시켰다. 그 사이 파키스탄 정부군에 의한 무력탄압으로 벵골인 300만 명이 살해되고, 1,000만 명이 인도로 피난하였다. 72년 1월 아와미 연맹 총재 라만이 수상이 되고, 라호르 결의를 기리기 위해 3월 26일을 독립기념일로 정하였다.


5. 방글라데시의 산업과 경제

경제구조는 벼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농업이 주체로서 취업인구의 77.1%가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며, 농업은 국내 총생산의 반 이상을 차지한다. 주요 농산물은 쌀, 주트(황마의 섬유), 사탕수수, 담배, 밀, 채소 등이다. 벼농사는 작부기가 1년에 3기가 있는데 건기작의 보르(12-4월), 우기작의 아우스(4-8월) 및 아몬(8-12월)으로 나누어진다. 일반적으로 2기작을 행하고 지형에 따랄 3기작도 가능하다. 작부면적은 보로가 2, 아우스가 4, 아몬이 7읠 비율로 아몬작이 가장 많다. 주트 재배는 19세기 초반에 영국이 보급한 것인데, 그때가지 이 지역의 주된 상품 작물은 남색 염료의 원료인 인디고였다. 그러나 유럽에서 주트의 수요가 증가함과 동시에 주트 재배가 증가하여 1910년대에는 동서벵골이 합한 주트 생산량은 세계의 80%를 차지하였다. 현재도 주트와 주트제품의 수출액은 전체의 60-70%를 점유하는 중요한 수출품이고, 주트 가공은 이 나라 공업생산의 약 30%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의 주트수요가 화학섬유의 보급 등으로 위축되자 주트 제품의 다각화가 이루어져 주트 카펫, 건축자재 등의 개발이 추진되고 있다. 실헤트 부근을 중심으로 재배 되는 차도 중요한 수출품이지만 품질이 떨어지기 때문에 스리랑카와 인도산의 차보다 값이 싸다. 공업은 주트 가공과 농촌지대의 가내공업 외에 파키스탄 때에 건설된 면방적 공장 등이 있다. 또 최근에는 천연가스의 이용에 의한 화학비료공업이 성장해 있고 가까운 장래에 수출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치타공에는 일본의 원조로 건설된 제강소가 있다.

정부는 경제거 자립을 강조하면서 독립 이래의 산업 국유화 정책을 바꾸어 민간 부문의 중시와 외자 도입에 의욕을 보이고 있다. 또한 도로망은 주요 도시에 연결되어 있으며, 육상교통의 발달이 늦은 편이다. 따라서 교통, 운수는 오늘날도 내륙운수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철도는 동부와 서부의 철도 궤도폭이 달라 수송능력이 약하다.



6. 방글라데시의 정치, 외교, 군사

  독립 후는 8,000만을 넘는 국민의 식량 확보와 자립경제 건설이 주요 과제로 되었다. 그러나 주트 외에 유력한 수출품이나 산업이 없어 연간 10억 달러를 초과하는 외국원조로 국가건설이 추진되었다. 그래도 연간 200만 t의 식량이 부족하고 물가의 상승 등 경제난이 계속되었다. 1974년 12월 무지부르 라만 수상은 비상사태 선언을 발표하고 이듬해 1월에는 헌법을 개정하여 의원내각제를 폐지, 자신이 대통령에 취임하고 독제 체제에 들어갔다. 그러나 정국은 안정되지 않고 75년 8월 반 인도파에 의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서 무지부르 라만 대통령은 암살되었다. 그후 제2,3차의 쿠데타로 격동의 시기가 계속되다가 군참모총장 지아우르 라만이 혼란수습에 성공하였다. 그는 77년 4월 대통령에 취임하여 행정기구 개혁, 민간투자의 장려 등으로 경제회복을 도모하였고 식략자급 달성을 위하여 농민의 집단 자조노력 정책 등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경제는 안정되고 79년 4월에는 민정이양도 실현되었다. 그러나 81년 5월 지방사령관에 의한 쿠데타 미수르 지아우르 라만 대통형은 암살되었고, 82년 3월에는 육군 참모장 에르샤드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났다. 에스샤드는 의회를 해산하고 계엄령을 선포, 그해 12월에 자신이 대통령이 되었다. 그 수 86년 5월 계엄령하에서 총선거가 실시되어 여당인 국민당이 과반수 의석을 획득하고 10월의 대통령 선거에서 에르샤트 대통령이 제선되었다. 그러나 방글라데시 민족주의당, 아와미 등의 야당이 선거 무효를 주장하자 에르샤드 대통령은 그해 11월 에르샤드 대통령은 야당이 그의 사임을 요구하며 격렬한 반정부 시위를 벌이자 비상사태를 선포, 야당지도자의 연금 상황에서 88년 3월 총선을 실시하엿다. 야당측은 보이콧으로 대항하고 투표는 혼란하였으나 투표 결과, 여당 국민당이 300의석 중 251석을 획득하였다. 에르샤드 대통령은 3월 22일 초두드리 총리 등 전 각료를 해임하고아메드 총리 내각을 구성한 수, 4월 12일 비상사태를 해제하였다. 6월 13일 의회는 회교를 국교로 개헌하였다. 의회는 단원제 국민회의로 의석은 330석(이 중 30석은 임명에 의한 여성의식), 임기는 5년이다. 정당은 여당인 국민당(자티야당), 임기는 5년이다. 정당은 여당인 국민당(자티야당), 방글라데시 민족주의당, 아와미 연맹 등이 있다.

  독립 당시부터 추구해 온 비동맹 정책을 채택하여 파키스탄, 중국과는 관계정상화를 이룩하였다. 인도와는 겐지스강 수리권 문제로 자주 분쟁이 일어났으며, 79년 11월 6일 인도군과 방글라데시군은 국경지대인 차르지역 영유권 문제를 둘러싸고 무력충돌이 있었다. 남아시아 7개국의 지역협력기구를 제창하였고, 83년 10월 에르샤드 대통령은 방미하여 친미적 입장을 천명한 바 있으며 12월 소련외교관을 추방으로 대소관계가 한때 냉각되기도 하였다. 에르샤드 대통령은 85년 6월 일본, 7월 중국을 각각 방문하고, 86년 7월에는 인도를 방문하였으며 8월에는 인도와 갠지스 강 수리권 문제를 통의하기 위한 양국 각료회의가 개최되었다. 경제원조와 교역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서방 선진국과의 관계도 중시하고 있다. 1990년 9월부터 대통령 에르샤드의 퇴진을 요구하는 야당세력과 학생의 시위가 빈발하여 12월 6일 에르샤드가 사임하였으며 1991년 2월 실시된 총선거 결과 민족주의당이 제 1당의 자리를 확보하였다. 3월 28일 민족주의 당 총재 할레다 지아가 방글라데시 최초의 여성총리에 취임하였다. 1991년 9월 대통령제를 의원 내각제로 바꾸었다.


7. 교육

초등교육은 5년간 무상으로 실시되지만 의무적인 것은 아니다. 학령기 아동의 1/2가량만이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으며 식자율은 세계의 평균 수준보다도 극히 낮은 편이다. 고등교육기관으로는 4개의 일반 종합대학교, 농업·공학·기술을 가르치는 2개의 전문교육대학교, 이슬람대학교가 있다. 1971년에 독립한 이후로 언론과 방송매체는 엄격한 통제를 받고 있다.


8. 방글라데시와 한국과의 관계

1973년 12월부터 남북한과의 정식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교하고 있다. 한국은 이미 72년 5월 18일에 방글라데시를 정식 승인하였으며 73년 6월 29일에 통상협정을 체결하였다. 74년 3월 수도 다카에 상주 대사관이 설치 되었으며, 78년 10월 무역관이 설치되었다. 78년 9월 방글라데시 공업상이 한국을 방문하여 상공장관회담을 가졌고 79년 6월 14일 문화협정이 서명되었다. 또 80년 5월 15일에는 한국의 농업진흥공사가 방글라데시 수자원 개발청에서 실시하는 파브나 지구 1단게 사업의 기술용역 계약을 체결하였다. 85년 6월 에르샤드 대통령이 방한, 한국과 합동위원회를 설치하여 매년 서울과 다카에서 개최한다는 공동성명을 발표(85년 6월 19일)하였고 한국과투자협정비준서를 교환, 88년 10월 7일자로 발효하였다.

2000년 대한 수입은 억 2600만 달러이고, 수출은 2200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품은 봉제제품, 황마, 어패류 등이며 수입품은 섬유, 봉제관련, 원부자재(수입액의 40%), 철강, 플라스틱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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