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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선교부 특강: 사람을 통해서 보여주는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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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wscs 작성일 10-09-30 17:16 조회 828 댓글 0
 
 

“사람을 통해서 보여주는 선교”

                                                                                                                        문 원 모 목사


                                                                                     화성지방 향남교회 담임

                                                                                         케노시스 영성사역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12:1-3)


1. 선교에 대한 문제의식

1) 선교방식에 대한 문제점 : 공격적인 선교

2007년 선교와 결부되어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라는 국가적인 차원의 문제가 있었고 이로 인해서 한국 기독교가 상당한 곤혹을 치렀습니다. 핵심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공격적인 선교”에 대한 세상의 비판입니다. 이것이 합당한 것인지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세계 선교에 한참 불붙었을 때 선교현장에서 일어났었습니다. 이제까지 진행되었던 기존의 “제국주의적인 선교”에 대한 문제의식이었습니다. 이것은 유럽을 중심으로 한 제국들이 미개하고 약한 나라들을 점령합니다. 그때 기독교 선교사도 같이 들어가서 복음사역을 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남아메리카, 북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수없는 지역에서 제국주의자들과 기독교인들에 의해 선교라는 명목으로 자행된 횡포로 얼마나 많은 토착 원주민들이 죽음과 고통을 당했는지 모릅니다. 토착민들의 문화, 종교, 경제, 땅, 생명 등이 철저하게 말살 당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때까지 수백 년 동안 이런 선교방식에 대해서 전혀 문제의식이 없었던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서 제국주의자들은 복음선교라는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그러다보니 그 한계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런 식의 선교가 합당한 것인지에 대한 심각한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2) 세계 교회의 위기 : 쇠퇴와 변질

2006년 인구센서스 결과와 함께 부각되었던 교회의 쇠퇴 위기론이 심각하게 논의되고 있습니다. 10년 새에 144,000명이 줄었습니다.

그런데 아십니까? 한국교회의 성장과정은 미국교회의 과정을 정확하게 30년 차이를 두고 따라가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미국교회는 1940년부터 1960년대까지 급성장을 하게 됩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습니다. 그러다가 6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정체현상을 보입니다. 그러더니 70년대 이후 미국교회는 그 쇠퇴현상이 급속하게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한국교회 역시 이런 과정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970년대부터 1990년까지 한국교회는 엄청난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다가 90년대 이후 정체현상을 보였습니다. 그러더니 2천 년대에 들어서 드디어 감소현상이 뚜렷해졌습니다.

그러면 이런 감소현상, 쇠퇴현상이 미국교회와 한국교회만의 현상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유럽교회는 이제 젊은이들이 없습니다. 70세가 넘은 노인들만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조금 있으면 그런 교회들조차 존립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교회 건물은 술집이나 디스코장이 되었습니다. 다른 교회는 이슬람 모스크, 불교 사원이 된 곳도 있습니다.

한편 미국교회를 보면, 기존교회는 쇠퇴현상이 심각합니다. 한편으로는 특이한 교회들은 성장하는 추세를 봅니다. 그런데 이런 교회들을 잘 분석해보면 적잖은 교회들이 변질되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학도 없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가 없는 교회는 더 이상 살아있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미국교회의 변질된 요소를 그대로 한국교회가 그대로 수입하여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꿩 잡는 게 매’라는 것입니다. 즉 교회가 성장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입니다. 과연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인가? 여기에 복음의 능력이 있는 것인가?

종교사회학자들은 세계교회의 변화현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부릅니다. 유럽형을 ‘쇠퇴형’, 미국형을 ‘변질형’이라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한국교회는 어떤가? 작은 교회들은 대형교회들의 횡포로 인해서 쇠퇴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형교회들은 갈수록 변질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의 대형화와 동시에 진행되는 전체 교인수의 감소 현상을 “쏠림현상”이라고 합니다. 쏠림현상은 말기현상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대단한 제국주의 선교역사를 이루었던 유럽의 교회들이 왜 무너지고 있는가? 밖으로 나아가는데 거의 한계점에 다다랐습니다. 한편으로는 내적으로 자기 갱신하는 영적 노력도 없습니다.

이제 한국 기독교뿐 아니라 세계 기독교는 선교의 문제를 논하기 이전에 존립의 문제를 논해야 합니다.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세계 기독교, 무엇이 문제입니까?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까?


2.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 사람을 통해서 보여주는 선교

우리는 이제 성서적으로 교회가 어떤 길로 가야하는지 그리고 선교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근본 질문부터 해 들어가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런 노력을 통해서 우리가 역사적으로 이루어졌던 선교의 모습들이 과연 성서적인가 여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미 100여 년 전부터 고민한 선교에 대한 세계기독교협의회에서 얻은 결론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Missio Dei 즉 “하나님의 선교”입니다. 즉 선교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선교는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 행하시는 이 세상을 위한 구속사업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선교를 어떻게 하신다는 것인가?

하나님의 선교 방식을 잘 보여주는 말씀이 우리가 대하는 창세기 12장의 말씀입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하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창12장은 아주 중요한 본문입니다. 하나님이 구원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창11장을 보면 바벨탑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벨탑 이야기는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는 것입니까? “법대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애써도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도시를 만들고 탑을 쌓아도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바벨탑 사건을 보면 지금까지 교회사에서 펼쳐온 선교의 모습들이 주로 바벨탑을 쌓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특히 제국주의적 선교는 “바벨탑 선교”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원방식이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말씀하기 시작하는 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하고자 즉 선교를 위해서 아브라함을 세우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은 그 후손으로 이스라엘 공동체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셔서 그들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이것이 신약으로 넘어와서는 교회공동체를 세우시므로 이들 공동체를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길을 택하십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짧게 표현한다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통해서 보여주는 선교!”

그럼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통해서 당신을 보여주는 선교를 하실까요?


3. 준비된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

선교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하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가 말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준비”라는 말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실지라도 속수무책인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렇습니다.

특히 준비는 세 가지 차원의 조건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것은 ‘언제’(때), ‘어디서’(장소), ‘누구를 통해서’(사람)입니다.


1) 하나님은 준비된 “때”에 일하십니다.

“언제”라고 한다면 역사상 가장 오래된 문명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입니다. 그 중에 살던 한 사람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택하셔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럼 왜 “메소포타미아 시대”가 선택되었나? 이는 “어느 문명이 가장 먼저 시작되었는가?”가 기준입니다. 좀 더 일찍 시작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 이때가 비로소 “준비된 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이해할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이 시대는 바로 아시아의 시대입니다. 구원사의 시작은 본문에서 보듯이 아브라함의 메소포타미아 문명 때부터였는데, 그것이 앗수르, 바빌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그리고 유럽을 걸쳐 아메리카의 시대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메리카의 시대는 종언을 고하고 있습니다. 이미 세계는 아시아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시아시대를 여시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시대의 주역은 중국이나 인도가 아닙니다. 일본도 아닙니다. 바로 21세기 선교의 주역이 되어야 하는 한국입니다. 하나님은 오래 전부터 한민족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할 준비를 해 오셨습니다.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


2) 준비된 장소에서 일하십니다.

왜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하나님의 거룩한 땅으로 삼으셨을까요?

먼저, 가나안 땅은 네 문명의 충돌지점이었습니다. 가나안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통로였습니다. 그리고 후에 등장하는 그리스와 로마의 상인들이 지중해 인근의 보물지역인 이집트 나일강 삼각주를 통과하는 통로이기도 했습니다.

나아가, 그곳은 척박한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땅의 절반 이상이 사막에 가까운 땅입니다. 게다가 5나라(블레셋, 시돈, 암몬, 모압, 에돔) 7족속(가나안, 헷, 아모리, 브리스, 기르가스, 히위, 겐)이 얽혀 살던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땅 크기는 강원도보다는 조금 큰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그런 곳, 전쟁이 끊이지 않는 곳, 척박한 땅, 그야말로 사람이 살기에 최악의 땅을 하나님나라의 모형으로 택했을까요? 그곳은 “가장 큰 고난이 준비된 땅”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나안은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심혈을 기울려 준비하신 “고난의 땅”입니다.

한민족은 수없는 “고난의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 존속해온 족속입니다. 이 모든 것이 고난의 터전 속에서 이 민족을 하나님께서 담금질하고 계신 것인 줄 깨닫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선하신 세상구원의 계획 속에서 우리 민족을 준비시켜 오신 것입니다. 이제 아시아시대에 가장 고난의 땅에서 준비된 백성인 한민족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실 카드를 꺼내시고자 합니다. 고난으로 다져진 한반도의 백성, 대한민국! 새 시대에 하나님나라의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역사적인 사명을 가지고 겸손하게 응답하는가 여부는 세상 구원을 위한 중요한 열쇠이고 이 나라와 민족의 존립이 달린 숙제입니다.


3) 준비된 “사람”통해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을 택해야 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준비”된 사람입니다. 이러한 큰일을 위해 하나님의 눈에 띤 사람은 유프라테스 강 하류 갈대아 우르에 살던 사람, “아브람” 혹은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무엇이 준비되었단 말인가? 그는 참 하나님을 찾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이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것을 지속적으로 고민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만나서 그와 함께 자기의 기존의 삶을 “떠나서” 새로운 출발을 한 아브라함은 이후로 고난스러운 삶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해갑니다. 무엇보다도 그가 준비되어가는 만큼 그와 함께 하는 이들은 그를 통해서 복을 받고 그로 인해서 행복한 인생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살아있는 “선교”의 모습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말하지 않아도 그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증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나그네의 삶을 살면서도 그와 함께 하는 지역사람들에게서 인정과 존경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선교방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보여주는 선교!”

아브라함의 변화되어가는 삶의 여정을 우리는 “영성”이라고 합니다. “영성”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유일한 대안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 “사역”에 초점을 많이 맞추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선교 방식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당시 세상을 구원해 가시는 것처럼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도록 우리 역시 준비되어야 합니다. 영성적 삶의 방식에 눈을 떠야 합니다.

문제는 준비입니다. 준비된 때, 준비된 장소, 그러나 준비된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너무도 심각하고 그만큼 간절한 지금, 준비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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